img
i
회원가입시 광고가 제거 됩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이재명의 실용외교 한국사에서 사르후 전투는 몰라도 조선시대 광해군 시기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을
한국사에서 사르후 전투는 몰라도 조선시대 광해군 시기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중립외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당시 임진왜란이 끝나고 후금(청나라)이 커가면서 위기감을 느낀 명나라가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군에게도 파병 요청을 했고 어찌어찌해 조선군도 명나라를 도와 원정군으로 싸움에 나서게 됐습니다.도원수 강홍립을 필두로 조선의 총 병력은 1만 7천 여명으로 사르후로 떠났습니다. 조명 연합군 10만 대군이 넘는 대병력을 4개로 나눠서 진군했고, 청의 기병대도 2만 5천 명이 참전, 부대를 4개로 나눠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청은 기병이 주력이며, 조명연합군은 보병이 주력이었습니다. 조선의 조총부대도 파병된 것으로 아는데 결국에는 조선군 1만 명이 전사하는 결과가 초래되었으며, 좌영장 김응하는 부차벌판에서 청의 부대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습니다.그러고선 도원수 강홍립은 나머지 5천 여명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청군에게 투항했습니다.광해군이 분명 싸우는 척만 하다가 투항하라는 말이었는데 좌영장 김응하가 이끄는 부대는 이미 궤멸했고 조선군의 명령 체계가 잘 안됐나봐요?물론 처음부터 조선군이 개털린건 아니고 전투 초반까지는 청의 기병대를 상대로 여러 번 선방하고 격퇴시켰지만 바람이 조선군 쪽으로 부는 바람에, 조선군 1만 명은 결국엔 랴오닝성 부차 벌판에서 쓸쓸히 죽어갔던 것으로 아는데 국사 교과서에는 이 사르후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왜 안나올까요?그때는 명-청이라면 지금은 미-중 간에 패권싸움이 있습니다. 대만이 공격당한다면 우리도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만, 현재 한국군은 그때 당시의 나약한 조선군대가 아니며 지금 미군을 제외하고, 한국군 단독 전력만 보더라도 중국군 입장에서도 한국군이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략적 관점에서 많이 바뀌었는데 지금도 광해군 시기와 시기가 거의 비슷한가요?
현대의 재평가:
실리 외교 재조명:
임진왜란 이후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 한 노력이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개혁 군주로서의 재조명:
대동법 시행 등 백성들의 삶을 위한 노력이 개혁 군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결론:
광해군은 재위 당시에는 폭군으로 평가받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실리적인 외교와 개혁적인 면모를 재조명받으며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2025년 현재 한국 상항은 전혀 다릅니다
한중은 서로 구애 중인 교역 대상국 1위란점이 이를반증 먹고 사는문제 앞에선 군사력 이나 정치적 문젠 그닥 우선권이 없다는 현실적
미중 무역관계에서 한국이라도 결속한다는것 이 중국에선 가장 중요 하고 미국의 압박에 숨돌릴 겨를을 찾는 한국 입장에서 돌파구가 중국과 교역재개 입니다 그런면에서 현정부의 실용와교는 가장 적합한 수단 방책이란 점